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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론/사진론

History of Photography 1

by EVAN 2019.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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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Photography 1

 - 사진의 탄생 -

1. 사진의 발명

 

1839819일 프랑스 예술원과 아카데미에서 합동으로 사진술을 발표

-니엡스가 발견하고 다게르가 발명 (다게레오 타입 은판)-

 

. 다게레오타입

다게레오는 은도금한 은판이나 동판에 옥도증기를 쏘여 생성된 옥화은화합물이 감광물질로서 작용하는데, 카메라 안에서 노출되는 동안 이 판은 잠상을 기록하게 되고, 그 형상의 현상을 위해 그 판을 가열된 수은을 쏘여 빛에 노출되었던 부분과 반응하여 수은화합물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밝은 부분을 이루는 아말감이라는 물질이다. 수은과 작용하지 않은, 즉 빛에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티오황산나트륨 정착액 속에서 용해시켜 버림으로써 다게레오타입이 생성되는 것이다.

 

 

Giroux-Daguerreotype Camera (1839 다게르) 세계최초의 카메라 (니엡스)

 

 

 

Lewis Daguerreotype Camera (1851년 미국) 나다르부인 1853 - Nadar

 

 

다게르 타입-화가의 화실에 있는 정물 1837 다게르 타입-파리의 템플 큰길 4839 다게르

 

 

. 탈보타입(칼로타입) 발명

다게레오타입이 공표된 후 채 3주도 못된 1839125일 영국의 과학자 탈보트(Willam Henri Fox Talbot)가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한 이미지정착에 관한 연구를 발명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포토그라피라고 하는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세상에 공표하는 첫번째 인물이 될 수 없었음에 실망이 컸다.

18406월에 탈보트는 촬영시간을 상당히 단축시켰고, 근대 사진화학의 기초가 되는 기술을 발표하였다. 감광시킨 종이에 노출을 주어 잔상을 형성시킨 다음, 질산은계로 처리된 은옥화물(다게레오타입의 감광재료)을 이용해 종이를 현상하여 일종의 네가티브를 만든다. 이것을 칼로타입(Calotype:칼로스(그리스어 Kalos '아름다운'Typos‘인상의 합성어)이라고 이름 붙였다.

 

복제성 때문에 금속보다는 종이에 찍힌 칼로타입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는데 밀착인화로 네가티브를 다른 감광종이와 밀착시켜 노광하면 포지티브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칼로타입은 다게레오타입 보다 복제성은 좋으나 보여 지는 이미지가 다게레오타입 보다 디테일이 떨어져 대중적으로 큰 인기는 얻지 못했다

 

열린문 (The Open Door 1844-탈보트) 칼로타입-탈보트의 사진작업

. 콜로디온 습판사진 발명

- 1851년 아처에 의해 콜로디온습판사진 발명

- 유리원판 사진 다량 복제 가능

- 다게레오타입, 탈보타입은 사양길로 접어듦.

 

1851년에 개발된 콜로디온 습판법은 영국의 조각가였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에 의해서 고안되어 1851년부터 젤라틴 건판이 나오기 시작한 1880년에 이르기까지 사진계를 장악했다.

 

칼로타입에서 쓰였던 종이류가 선명성 부분에서 뒤지자 종이 대신에 유리를 사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1847년에 니엡스의 조카인 끌로드 펠릭스 아벨 니엡스에 의해서 유리판에 은염류인 계란 흰자위인 (알부민albumin)를 이용한 방법이었다. 이 알부민을 이용하는 방법은 빛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져 자연적으로 노출시간이 길어지는 단점이 있어 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다만 건축사진과 같이 고정된 상 앞에서 긴 노출시간을 주어 완성하는 사진에서 주로 이용되었다.

 

새로 발견된 것이 요도화은(沃化銀) 콜로디온이라는 재료인데 이것은 알콜과 에테르에 니트로셀룰로스를 녹여 만든 점액질 용제이다.

콜로디온은 빠른 시간 내에 건조되어 방수막을 띤 막을 형성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에 젖은 상태에서는 점액질이지만 건조하게 되면 단단하고 투명진다. 그러나 콜로디온이 건조함에 따라 감도가 급속히 저하하기 때문에 축축한 상태에서 노출과 현상과정을 끝내야만 했다.

따라서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으려면 완전한 암실을 형태가 바로 옆에 있어야 했다. 특히 야외촬영을 나갈 때에는 사진을 찍는 장소마다 암실 전체를 운반해야 하는 수고를 치러야 만 하나의 사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콜로디온 습판은 다게레오 타입에서 이룰 수 없었던 복제 가능성과 칼로타입에서 이룰 수 없었던 정밀함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1882년경까지 유행)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습판 카메라-Wet plate camera

 

 

2. 초상사진의 시대

- 1840년대부터 1870년 까지는 초상사진의 시대 -

- 초상사진가 : 나다르, 르 그레, 카메론 여사

 

과거에는 귀족만이 초상을 가질 수 있었으나 은판사진 덕분에 누구나 초상사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초상은 이별, 죽음, 소멸과 영원한 젊음과 정체성을 전제로 하였다.

떠나간 사람을 잊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여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떠 올려주며, 젊은 그 때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해 주며, 초상은 얼굴의 동질성이 뜨겁게 묻어나 신분증 역할을 한다.“

 

 

하버트듀크워크 부인 1867 - Cameron 나다르 자화상

 

3. 예술사진시대

- 1850년대부터 1880년 까지 영국의 예술사진시대” -

- 사진의 예술성 인정 (프랑스 법원) -

프랑스에서는 1855파리만국박람회에 사진이 참여했고 1859살롱보자르 Slone des Beau Arts"에 입성하였으나 보들레르와 앵게르 같은 모더니즘 미술가에게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 살롱에 들어간 후 이류화가 출신의 사진관 주인, 학력 없는 판각사, 화공약품판매상, 원판을 수정해 주는 수정사들까지 나서서 사진예술을 한다 하여 창작품에 대한 문제가 되어 제소하였고, 미술 쪽에서도 살롱에 입성을 반대하기위해 과연 사진이 예술인지 아니지를 판단해 달라는 송사를 내었다. 그 결과 1862년 프랑스 파리법원에서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으로 예술성 논란이 끊임이 없었고 만인이 인정한 예술이기 위해서는 예술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사진을 보여 주어야했다.

프랑스에서는 이시기 로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살롱보자르에 얼굴을 내밀기는 했으나 세계사진사에 얼굴을 내밀 당대의 역작을 탄생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48년 프랑스의 대혁명으로 유럽전역이 어수선하여 경제, 산업, 문화가 어렵게 되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영국에서는 국가에서 전세계적인 사진대제전(1851) 국제사진전(1858)을 열고, 국가가 사진을 매입해 주고, 계급에 관계없이 사진 활동 보장해 주어 많은 사진가들을 배출하였다.

(D. O. Hill 1802~1870) 과 아담스(Robert Adamson 1821~1848)은 스코틀랜스 출신으로 조명, 촬영, 현상, 인화, 야외촬영, 자연스런 포즈, 소품, 연출, 컬러링, 리터칭 등을 분업하여 칼로타입과 다게레오 타입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당대에 대표적인 초상사진가 이자 아주 훌륭한 예술사진의 초기 선각자이다.

 

 

오스카 레일란더

스웨덴 출신으로 사진을 시작하면서 조명, 구도, 포즈는 그렇다하더라도 스튜디오 안에서 찍은 내용이 없는 사진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고민데 빠졌다. 그는 사진이 예술이라면 예술로서 주제, 내용, 형식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술(당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회화가 공존하는 시기)처럼 그리스로마의 문학에서 이상화된 고전미를 표현하면서 로맨틱하고 도덕적인 주제를 끌어내어 관람자에게 경외감과 도덕심을 고양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사진적인 주류가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로서의 사진을 염두에 두고 내용과 형식을 동시대 회화적 스타일을 모방, 답습한 Pictorial Photography(회화주의 사진)가 탄생되어, 사진은 회화적 광선, 의상, 포즈, 연출, 네거티브 합성, 리터칭 등을 행했다.

 

오스카 레일란더 인생의 두 갈래 길” 1857

헨리 피치 로빈슨

동시대의 낭만주의 회화와 문학을 아루르는 문학적 주제, 고딕로망 중에서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헨리 피치 로빈슨 임종” 1858

 

 

4. 자연주의 사진

 

영국의 피터 헨리 에머슨 (Peter Henry Emerson 1856~1936)은 의학을 전공한 후 사진을 접한 그는 기존의 회화주의 예술사진의 기법을 시대의 요구에 따라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사진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과학과 예술의 결합에 따른 개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가져야 하며, 이를 토대로 과학자의 분서적 시각과 인간의 눈의 재현적 특성을 이해하고 부합해야한다.

그가 말하는 사진이 순수예술(Pure Art)이기위한 4가지 자연주의특성

자연주의 주제

고딕로망 같은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자연스런 현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해야 한다.

자연적 환경

인위적인 포즈. 조명을 멀리하고 자연스런 일상의 빛, 포즈를 취한다.

자연적 기교

조합인화나 리터칭이 아니라 오직 카메라렌즈에 따라 제작해야 한다.

자연스런 드러남

인간의 눈처럼 편안하게 인식할 수 있는 자연스런 이미지가 드러나야 한다.

사진은 Peter Henry Emerson에 의하여 19세기의 회화를 모방하는 사진에서 인간의 눈을 신뢰하는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전환되었다.

 

- 자연주의 화가 밀레, 터너, 휘슬러의 영향을 받음-

 

 

Peter Henry Emerson “어부” 1886

 

 

5. 살롱 사진

살롱사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하나의 사진 경향이자 사진적방법론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리얼리즘사진에 비해 열등한 사진으로 매도되기도 하였다)

살롱은 18세기 초반 유럽에서 정부와 귀족 간에 정부의 정책이나 중대사를 나누고 귀족 간에 친목과 교류를 하는 고정적인 사교모임의 장소를 지칭하였다. 하나의 자본주의 시대의 양식으로 환담의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살롱 한 켠에 피아노가 놓여졌고 벽에는 왕족이나 귀족이 소장한 그림을 걸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개인이 도맡아 하기에는 부담스러워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례 콘테스트 성격의 살롱이었다.

 

그 당사 가장 유명한 살롱이 파리살롱이었고 그 뒤 비엔나 살롱”, “베를린 살롱이 뒤를 이었으며, 살롱에서 당선이 되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기에 예술가들은 살롱에 매달리었다.

 

사진살롱은 1880년 중반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는다. 1871년 젤라틴 실버 브로마이드 건판사진술이 완성되고 1888년 조지이스트만이 박스카메라와 롤필름을 제작하여 사진의 대중화를 촉발하였다. 1990년들어 세계사진은 살롱사진이 바야흐로 꽃을 피워 보편적인 사진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에 말 맞추어 사진협회, 사진연합, 사진클럽, 사진서클이 무수히 태어난다.

이때 유명작가로는 영국 회화주의 사진의 거장 헨리 피치 로빈슨, 자연주의 주창자 피터 헨리 에머슨, 근대사진의 아버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비엔나, 베를린, 런던살롱 등에 입상하여 유명해짐), 에드워드 스타이겐 등이 있다.

사진살롱은 점차 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활발해져서 1862년 필라델피아 사진협회, 시카고사진연합, 미국사지협회(PPA)가 생겨났다.

 

살롱사진의 특징

연례 최고의 사진을 뽑는 사진의장

예술을 최고 목표로 삼았기에 그 시대 회화사조, 회화풍에 따랐다는 점

과반수 이상이 미술계 인사들이 심사위원이었으므로 더욱 예술적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

 

살롱사진의 역사적 부작용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사진풍이 최고로 인식됨

콘테스트가 난립하여 권위유지를 위하여 상금을 높여 황금만능주의 심화

살롱의 본연의 취지이었던 예술사진의 부흥과 함께 작품구입으로 연결되는 자연스런 기능이 사라짐.

아마추어 사진클럽의 난립으로 살롱콘테스트가 유희의 장으로 전락.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1902년 모든 것에서 분리한다는 사진분리파의 창립을 선언하였으며, 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살롱사진이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조지 데이비드슨 웨이터 그린의 연못 반영” 1898

 

 

# 해당 글은 http://www.moonsw.com 포토그래퍼 문상욱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글이며, 무단 게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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